Chapter 20
1.
키보토스 3대 학원 중 하나인 밀레니엄.
현재 내가 재학 중인 밀레니엄은 외교적으로는 굉장히 특수한 위치에 있는 학교였다. 타 학원과의 교류는 별로 없고, 그 탓에 분쟁 또한 별로 없는.
게헨나,트리니티와 함께 3대 학원으로 불리우는 처지이면서 밀레니엄은 키보토스에서 큼지막한 사건이 터져나갔을 때에도 엮인 적이 없을 정도로 외교적인 부분에서는 정말 청결했다.
오히려 밀레니엄이 엮이는 쪽은 학원과의 분쟁이 아닌, 데카그라마톤이나 무명사제와 같은 엄밀히 말해 ‘사람이 아닌’ 쪽의 문제들이었으니.
그런 외교적 특징 때문일까, 밀레니엄은 황륜대제와 같은 거대 행사나 타 학원이 보내오는 의뢰와 같은 사사로운 일들까지 잘 받아서 진행해 준다는 점에서 키보토스 내에서 일종의 중립국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는 학교 전체의 특성이 아닌, 개인 간의 신분이나 감정 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게헨나 학생이 트리니티 자치구에, 혹은 트리니티 학생이 게헨나 자치구에 발을 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한쪽이든 자치구 내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짐작조차 못하게 될 정도일 것이다. 이렇듯, 밀레니엄을 제외한 학원들의 학생은 외교적인 입장에 따라 처하는 상황이 다르나 밀레니엄의 학생은 어떤 자치구를 가든 그러한 분쟁이 딱히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항상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키보토스인 만큼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하는 경우가 존재하긴 했으나 그 부분은 외교적 갈등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거기다, 초현상특무부가 가지는 명성도 있죠.”
“흐음.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베리타스 아이들과는 미리 이야기를 끝내놓았다고 하셨죠?”
“네. 고맙게도 도와준다고 선뜻 말해주셨어요.”
그렇기에 나는 영웅이 아닌 ‘학생’ 신분의 나나시로써 활동할 때에는 밀레니엄의 외교적 특성과 더불어 초현상특무부의 명성을 함께 사용할 예정이었다.
두 개의 신분, 두 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내가 계획한 방식이었다.
영웅이자 모두의 친절한 이웃인 ‘실크’.
밀레니엄 출신 초현상특무부의 파견 요원 ‘나나시’.
그리고 이러한 이중생활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부장인 히마리의 동의와 도움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내가 베리타스에게 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그래서 히마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면서도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럴 수밖에. 내가 꺼낸 이야기는 지금껏 유지해오던 초현상특무부의 폐쇄적 행보에서 벗어나 마음껏 명성을 이용하겠다는 이야기였으니.
그것도 이제 막 들어온 신입부원이.
‘……거절해도 할 말이 없기는 한데.’
뭐라고 해야 할까, 최근 며칠 동안 히마리와 붙어지내면서 그녀와의 사이가 부쩍 가까워졌다는 감각이 들기는 했다. 히마리도 나를 편하게 대하는 것이 느껴졌고 말이다. 하지만…….
개인 간의 관계와 부장으로써의 역할은 다를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초현상특무부의 특별한 방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후후, 좋아요. 크게 문제는 없겠어요.”
“…….”
……그냥 허락해 줬다.
이러면 걱정한 내가 바보 같잖아.
“저야 사랑스런 후배가 열심히 활동을 하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답니다. 아마 에이미도 같은 의견일 거에요. 그렇죠? 에이- 저기, 옷 좀 입어주세요. 제발.”
“응…? 더우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나도 신경 안 써. 애초에 그런 게 있었나?”
“하아, 그래요……. 아무튼 에이미도 동의했으니 그렇게 신경 쓰실 건 없답니다. 그리고 나나시가 제안한 다른 건에 대해서는…….”
내가 제시한 또 다른 이야기이자, 내 목표.
바로 영웅들의 집단인 ‘디펜더스’를 말하는 것이다.
“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최근 밀레니엄의 기류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으니. 그나마 나나시가 열심히 활동을 해준 덕에 분위기는 나아졌다곤 하나 여전히 미지의 위협요소는 존재하니까요.”
그녀가 말하는 위협이 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데카그라마톤, 게마트리아, 무명사제, 뭐 그런 것들이겠지.
‘언젠가는 결국 마주해야 할 놈들이라면, 미리 준비는 해놓는 게 맞겠지.’
나 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언젠가 닥쳐올 것이다. 그때가 오면 모두의 힘을 빌려야한다.
나는 그 준비를 미리 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조직의 운영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대로 회의를 진행해 보아야 할 것만 같네요. 지금은 단순히 구상 단계에 그치지 않은 거 같으니.”
“네. 맞아요.”
“좋네요. 후후, 나나시가 이런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역시 당신을 초현상특무부로 데리고 온건 옳은 선택이었던 거 같네요.”
“……하하.”
나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던 히마리는 이내 자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나시?”
“네?”
“당신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코사카 와카모도 그 ‘디펜더스’라는 조직에 소속되나요?”
“……어. 그건 아직 모르겠는데요. 직접 대화를 해본 게 아니라서.”
“후후, 나나시도 참. 당연한 이야기로 빠져나갈 생각은 마시고, 제대로 이야기해 주세요. 어서.”
“서, 선배?”
“설마, 당신을 그렇게나 다치게 한 여자를 저와 같은 조직에 속한 동료로 만들 셈인가요?”
뭐야. 무서워.
제대로 보니까 능글맞은게 아니라 살짝 무서운 미소였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죽어있어. 뭐에요.
그러고는 천천히 내 손목을 어루만지기 시작하는 히마리. 내가 움찔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 팔을 꼭 잡으며 당겨왔다.
“대답해 주세요, 나나시. 그 아이가 당신의 뜻을 거절할 리가 없다는 것.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어, 어어. 그게 말이죠…….”
……사실 맞다.
히마리의 말대로 내가 와카모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녀가 보이는 반응을 보았을 때 나중에 요청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그래서 나중에 만나게되면 따로 제안을 건넬 생각이었는데, 그게 디펜더스 합류는 아니었다.
나는 키보토스에 즐비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단순히 패 하나뿐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마, 말할게요. 말할테니 손 좀…….”
“안돼요. 나나시가 제대로 말할 때까지는 절대로 제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러니 어서 말해요.”
“네, 네…….”
“………더워.”
에이미의 자그마한 불평을 배경 삼아, 나는 아직까지 구상 단계에 불과한 또 하나의 계획을 히마리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머지 않아서 찾아올 전란들을 대비해 생각해 두었던 계획 중 하나.
게임에서도 그러했듯이 뒷세계에서 살아가는 불량배, 용역, 헬멧단들을 하나로 규합할 또 다른 세력.
‘썬더볼츠’에 관한 이야기를.
2.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네.”
“응.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지만, 재밌어….”
“우왓, 오자마자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우타하 선배, 히비키! 두 사람 모두 저만 빼고 엄청난 사람이랑 대화를 하고 계셨던 거군요!”
“하하…….”
이미 베리타스에게도 전해놓았겠다, 나는 안부 인사도 하고 새로운 장비 의뢰도 맡길 겸 엔지니어부로 찾아가 동일하게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히비키는 눈을 반짝이면서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우타하 선배는 흥미로운 이야기라며 주의깊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만나게 된 익숙한 얼굴. 가챠를 돌릴 때마다 들려왔던 활기찬 목소리의 소유자.
토요미 코토리도 이번 상담에는 함께 참여했다.
그동안은 어떤 의뢰라도 맡고 있었는지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오늘 우타하 선배가 사람을 한 명 소개해 준다고 하더니 코토리가 나타났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나나시라고 불러주세요.”
“네! 토요미 코토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코토리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곧바로 그녀들에게 ‘디펜더스’ 계획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디펜더스의 목적은 ‘실크’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을 함께 해결하는 조직이라는 것.
지금은 초현상특무부와 베리타스 멤버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향후 다른 학원의 멤버들이 추가될 수도 있다는 점 등.
간단히 이야기하자 세 사람 모두 큰 관심을 보이며 내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기본적인 목표와 세부 목표에 관해서와 조직의 운영 방식, 향후 영입할 계획인 멤버들에게 대해서까지.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들이 내 계획에 깊은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으니 열심히 대답해줬다.
“음. 좋아. 난 동참할게.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영웅인 네가 다른 속내를 품었을 거 같지도 않고,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하기도 어려우니까. 하하.”
“응…. 나도 도와줄게. 최선을 다해서.”
“앗! 이러면 저만 빠질 수가 없는 분위기잖아요! 물론 저도 어차피 동참할 생각이었지만요!”
세 사람 모두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나는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고, 그녀들은 각자 미소를 지으며 내 인사를 받았다.
‘디펜더스’에 관한 이야기는 간단히 끝났다.
그러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꺼낼 순간이 왔다.
“새로운 장비를 하나 의뢰하고 싶습니다.”
“그래. 이제 슬슬 얘기가 나올거 같기는 했어.”
“이번엔 어떤 장비야?”
우타하는 예상했다는 듯 웃었고, 히비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토리는 눈을 빛내며 기대하는 모습.
“제가 이번에 의뢰하고 싶은 장비는… ‘방패’입니다.”
“……방패?”
“네. 대신 일반적인 방패가 아니라, 일종의 공격 능력도 갖춘 방패가 필요합니다.”
학생 신분인 자신과, 영웅 신분인 자신.
두 영역이 겹치지 않고 의심받지 않게 하려면 우선 근본적으로 활동 방향과 분야, 그리고 전투 방식부터 차이를 둬야만 했다.
그렇기에 생각한 방식이다.
‘실크’가 빠른 기동성과 적을 제압하는 데에 특화된 전투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면, ‘나나시’는 그것과 달리 우직하고 수비적인 스타일의 방식으로 싸우자고.
마치, 캡틴 아메리카처럼.
“하지만 왜 방패를…? 네 전투 스타일상 방패를 함께 사용하면서 활동하는건 굉장히 불편할텐데?”
“맞다. 말씀을 안드렸네요. 이번엔 실크가 아닌, ‘초현상특무부의 요원’의 신분으로 사용할 장비입니다. 베리타스에게 듣기론 저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꽤나 많다고 해서요.”
아.
내 설명에 그들은 단숨에 이해했다는 듯 끄덕였다.
실크가 아닌, 초현상특무부 부원 나나시로써의 활동.
그것도 슬슬 시작하지 않으면 의심을 받게 될테니.
그녀들은 내 뜻을 이해하자마자 곧바로 건설적인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나갔다.
“좋아. 이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눠볼까?”
“응. 시작하자.”
“저도 기대되네요!”
“좋습니다. 우선 제가 구상한 부분을 먼저 알려드릴게요. 제 생각은-”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장비에 대한 이야기로 늦은 시간까지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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